파장동 광교산 등산로 입구에 올 한해 내가 지어 먹을 텃밭을 빌렸다.이건 미리 계획한 일이 아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주말 동연이 유치원 텃밭 행사에 갔다가 '도시농부학교'강사님이 흙 한줌 떠서 냄새 맡아보라,풀뿌리 뽑아 그것도 한번 냄새 맡아 보라,낙엽 밑에 깔린 흙도 떠서 냄새 맡아보라 하면서 하도 생생하게 이야기를 잘 하시길래 나도 모르게 '애라 모르겠다.나도 올해 한번 해보자'하면서 땅 한토막 덜컥 빌린거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지...우리 대연이가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왕곡동에 살때 아파트 바로 옆에 땅을 조금 빌려 한 2년 텃밭을 가꾸긴 했다.그리고 음...옥수수가 쑥쑥 자라면서 바람에 이파리들이 쓰쓰쓰쓰 소리내며 흔들리던 기억,감자.고구마 캐내며 너무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텃밭은 결코 텃밭이 아니고 아주 농사를 지을 마음이 없다면 안하는게 낫다는 생각도 그때 한듯 하다.

'애새끼한테 맞추려면 아예 텃밭 하지 마라' 는 도시농부학교 강사님의 말씀에 어찌나 큰 감동이 밀려오던지.올해 내가 지을 텃밭은 순전히 내가 좋아 나 자신을 위해 하기로 맘 먹었다.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설레기도 한다.

막상 땅을 빌리고 보니 할 일 없는 내 아침 스케줄이 어찌 이리 빡빡한지.월요일 성당청소,화요일 성당 소공동체모임,수요일 판공성사,목요일.금요일 어린이도서연구회 강의듣기.그러면 텃밭까지 가는데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그건 아니지!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네.시계를 보니 5시.지금이라도 빨리 갔다오자. 동연이가 4층 현우집에 놀러 간 사이 나는 모자 쓰고 목도리 두르고 빨래통에 던져놓은 추리닝 찾아 후다닥 걸치고 호미 한자루 사서 자전거 페달을 있는대로 밟았다.얼마나 달렸던지 손수건에 목도리까지 두른 내 목이 온통 땀이고 내 입은 자꾸 바짝바짝 마른다.

5시 27분.마음이 너무 급해진다.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땅 한번 뒤집어놔야 하는데 너무 사람이 없어 무서우면 어쩌지...

밭에 가 보니 목장갑도 물 한통도 안챙겨 온 내 무계획적인 열성이 그저 무식하게만 느껴진다.그래도 그런거 탓할 시간도 없다.얼른 일 시작하자.

새동신유치원 원장님께 전화드리고 퇴비 자루 하나 끌고와 내 밭에 이쪽 저쪽 흩뿌렸다.지나가던 등산객들이 힐끔 힐끔 쳐다본다.이래 뿌리는거 아닌가...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자전거용 두툼한 장갑 끼고 잡초 뽑고 돌 골라내고 퇴비가 골고루 섞이게 호미로 열심히 열심히 흙을 뒤집었다.

콩쥐가 이런 맘이었을까.이러다 내 오른팔 빠지지 않을까 싶을만큼 열심히 흙만 뒤집었다.

산에서 내려가던 한 아저씨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런 나를 한참 뻔히 쳐다본다.나도 민망해 아무 말없이 같이 쳐다봤다.그러니까 아저씨 묻는다.

"그거 빌리는데 얼마요?"

"예,이거 요만큼 삼만원인데요."

"고거 몇 평쯤 돼요?"

"이거 서너평쯤...한 세평쯤 되겠네요."

"음...그거면 한 가족 한해 먹을건 얼추 나오겠네!"

아저씨가 이 말을 남기고 내려 가신다.아저씨가 내게 주고간 마지막 말씀은 나에게 "아줌마, 지금 제대로 잘 하고 있어요."하는 말로 들린다.달랑 호미 한자루 쥐고 급하고 쪼들린 맘으로 흙만 뒤집던 내 마음이 갑자기 대단한 수확을 앞둔 노련한 농꾼이 된듯 느긋해진다.아저씨 진짜 고맙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와서 한번 더 손 봐야지 하고 오늘 일은 끝냈다.

내려가는 길은 내리막이라 올때만큼 힘들지 않지만 기온이 뚝 떨어져 너무 춥다.땀이 식어 한기까지 든다.

밤에 홍성 올케한테 전화하니까 씨감자를 구해서 심으라고 한다.그러면서좀 늦었네요 한다.하~이러면 내 맘이 또 바빠지는데...